Liturgy - 93696
미국 인디락씬의 힙스터들에게 블랙메탈 난도질 하기가 들불처럼 유행한 것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은 아니고 Deafheaven이라는 밴드 혹은 블랙게이즈라는 장르의 탄생 자체가 이러한 뻘짓거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같은 시도라 해도 명이 있으면 암이 있는 법..데프헤븐같은 밴드가 나름의 설득력을 갖춘 방법론을 가지고 정석적인 테크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이런저런 시도를 한 모범적인 타입의 밴드였다면 여기 Liturgy가 참으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만한 행보만을 걸었던 밴드이자 노르웨이/유럽의 원조 블랙메탈러와 그 추종자들이 교회 태우던 시절의 지옥불 고대로 옮겨 붙여 태워죽이고 싶을 개떡같은 시도들만을 일삼았다. 기본적으로 블랙메탈 스타일의 리프와 드러밍, 간헐적인 보컬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밴드의 음악은 지극히 파편적이고 해체적인 사운드의 난잡한 나열에 가깝다. 힙스터답게 챔버뮤직/인디락 갬성이 그럴듯하게 등장하기도 하지만 IDM스타일의 일렉트로닉스와 너저분한 노이즈락/글리치 사운드의 두서없는 뇌절이 한바탕 지나가면 느닷없이 오케스트레이션과 오페라 사운드가 깔리고..뭐 그런식인거다 아방가르드 메탈/포스트 메탈이라 불리우는 음악들 특유의 뭔가 있을듯한 분위기는 잡는데 결국 뭐였지 싶은 그런 류의 사운드...가 가장 최악으로 안좋은 형태로 발현된, 그게 Liturgy라고 나는 생각했다. 음악이 맥락이 없는걸 넘어 맥락이 왜 필요하냐는 식으로 나오니 오히려 할말이 없는것..난도질이 너무 심해 원조의 형태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최초에 품었던 '블랙메탈을 악랄하게 훼손한다'는 불쾌감이 생각보다 빠르게 잊힌다는게 의외의 장점(?)이랄까.
헌데 이 앨범 '93696'은 기억에서 싹 지우고 있던 이 밴드를 기어이 떠올리게 할 정도로 발매와 동시에 온갖 웹진과 인터넷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이 밴드가 더러운 서양 힙스터놈들의 그야말로 아이돌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는듯하다. 전부터 이 밴드 이상할 정도로 서양놈들에게 평가가 좋았던 기억이 나는데 프론트맨이자 작곡자인 Hunter Hunt-Hendrix는 성전환(...)을 해 Haela Hunt-Hendrix가 되었으며 LGBT 아이콘..의 지위까지 획득했으니 힙스터의 본산 피치포크는 신보에 8.0을 날리며 무발기사정을 시전해버린다.. 뭐 그런것들은 덮어두고라도 이 앨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평들이 워낙 어마무시하게 좋은데다 더블앨범에, 미국 힙스터 뮤직씬에선 주가가 상당히 높은 엔지니어인 Seth Manchester와 골방/언더그라운드 뮤직의 타격감과 라이브감을 굉장히 잘 살리는 대가 Steve Albini 선생이 레코딩에 동시투입됐다는 점은 아무래도 궁금함을 참기 힘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이 개떡같은 놈들이 뭐라고..하는 생각과 뭔 씨발스러운 짓을 해놨나 들어나보자 하는 마음 반반이랄까..
그래서 '93696'은 놀랍게도 이 힙스터 병신들이 최초로 만들어낸 '듣기 좋은 앨범'이라 해도 무리가 없지않을까 싶은 느낌이다. 정확하게는 음악을 만드는 목적이 최초로 '뭔가 알수없고 좆같은 시도를 해 있어보이게 노이즈를 만들어내는것'에서 '듣기에 좋은것을 만든다'로 수정되었다고 봐야할런지도 모르겠다..내 짧은 식견에서 비롯된, 지극히 개인적인 고약한 오해였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들리는걸 어쩌리. '93696'엔 인디락 갬성/글리치/약간의 현악세션/블랙메탈 한스푼 등 그동안의 Liturgy를 대표하던 특성들이 모두 들어있지만 대부분 상당히 따뜻하고 화사한 느낌의 감성적인 사운드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뭐랄까, 표현의 양식이 조금 다르긴 한데 그래서 결국 돌고돌아 '블랙게이즈'인거냐 같은 느낌이랄까. 꽤나 광폭하게 무언가를 탐구하는 듯한 포지셔닝을 오래도록 고수했지만 끝내 하는짓이 다 뜯어발기는거 외에 뭐가 없었으니 말이지..HHH는 내안의 여성성을 주체할수 없어 트렌스젠더가 되길 결심했다 하는데 그 시기가 아무래도 이 밴드가 본격적으로 좀 음악같은 음악을 하기 시작한 때와 맞물린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음악적 허세를 다 때려부수고 나니 뽀얗고 예쁜 사운드가 나온듯한 그림이 박혁거세 탄생설화 같은..뭐 그런 얘기. 결론은 의외로 미디어가 떠드는게 아주 공치사는 아니었던거 같고 블랙메탈은 발만 담그고 지나간 느낌이라 블랙메탈팬도 뭐 그렇게 불쾌할 것도 없을거같고...괴악함으로 점철된 전작들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